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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개나 소나라 하는가, 아리랑문화 융성시대 가시화(2013년 10월 17일)
작성자 문예창작과 박덕규
날짜 2020.11.20
조회수 207
URL : http://news.nate.com/view/20131007n18661 
언론사 : 뉴시스 
기사게재일 : 2013-10-07 

누가 개나 소나라 하는가, 아리랑문화 융성시대 가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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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그야말로 ‘아리랑문화 융성’ 시대를 맞이한 듯하다. 축제의 계절 10월에 들어 이를 실감하게 된다.

곳곳에서 ‘아리랑 ○○’라는 제명을 한 축제와 관련행사가 개최되거나 계획되고 있다. 이미 2일 개막된 대한민국아리랑제(정선아리랑제)를 시작으로, 3일 광주세계아리랑축전, 5일 ‘코리안아리랑페스티벌’(재외동포재단), 영천아리랑제, 7일 공주아리랑한마당, 11일 ‘서울아리랑페스티벌’(크라운해태), 11월1일 진도아리랑축제, 그리고 12월 한 달 동안 ‘창덕궁아리랑제’(창덕궁창극원)로 이어진다.

아리랑경창대회(정선·영천) 개최, ‘문경새재아리랑비’(문경시) 건립, 제1회 ‘대한민국아리랑학자대회(강원일보) 개최, 아리랑자료전시회(국립국악원) 개최, 영화 ‘아리랑’ 재평가(아리랑학회) 같은 행사도 개최되거나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정선·진도·영천 지역의 행사를 제외한 것들은 지난해부터 시작되었거나 금년 들어 새롭게 추진된 행사이다. 이는 지난해 12월6일 세계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논의에 영향 받은 것이거나 등재에 따른 긍정적 후폭풍인 듯 보인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개나 소나 아리랑’이라거나 ‘우후죽순격 난립’이라며 시샘 어린 경계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런 비판은 등재 1주년을 전후한 금년 말이면 더 거세질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정선·영천·공주 행사를 참관하면서 이런 비판에는 유보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전국적이고 집중적인 아리랑 행사는 아리랑만의 특성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주목해야할 상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랑의 다양성만큼이나 그 주제와 양식에 개별성(지역성)이 있어 그 ‘다름과 같음’을 상호간에 확인하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리랑의 ‘인류문화유산적 가치’의 발현을 확인시켜주는 방식이며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아리랑문화의 중요한 국면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즉,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같으면서 다르고,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라는 아리랑만의 각별한 멀티성(multeity)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여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선후 관계 속에서, 변화와 지속을 이루며 자기복제로 증식하는 프랙털(fractality)적 실체임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각 지역 아리랑의 속성을 상호 교차대비하여 이해하고 가치화하는 계기도 필요하다. 강원 아라리(아리랑)의 시원성(始原性), 문경아리랑의 변혁성(變革性), 밀양아리랑의 동시대성(同時代性), 본조아리랑의 보편성(普遍性), 진도아리랑의 즉흥성(卽興性), 영천아리랑의 역동성(力動性)이란 속성을 상호 교차대비하여 각각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과정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더해 민요 아리랑에서 가요·록(K팝)아리랑·가곡아리랑 같은 장르의 내적 확산은 물론, 연극·악극·창극·무용극 같은 타 장르로의 확산현상을 통해 생활문화로 보편화 되어있음을 인식하는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세계유네스코가 개별(個別) 아리랑이 아닌 포괄 명칭 ‘아리랑’으로 등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의 민요(노래) 아리랑이 아니라, 각각 아우르는 융합, ‘노래 그 이상의 아리랑문화’일 때에야만 가치화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체는 각각의 합보다 크다’는 트랜섬(transom)적 논리대로 지역 아리랑이 아닌 그 융합인 ‘아리랑문화’일 때에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 아리랑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아리랑은 이별과 이탈에 의한 정한(情恨)의 수렴체로, 극단과 편향의 차단체로, 개인과 공동체의 고난에 대한 극복의지의 추동체로 기능하여 인류문화유산으로 보편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의 전국적이고 집중적인 아리랑 현상은 난립이 아니라 ‘아리랑문화 융성시대 도래’로서의 긍정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중국으로부터 “한국은 아리랑을 길거리 음악으로 방치했다”는 비아냥과 북한이 “우리는 국가적으로 10년째나 아리랑을 세계에 알려온다”는 호언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에 오늘의 ‘아리랑하기’는 더 주목하여 지원하고 관찰해야 할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더 적극적으로 이를 아리랑문화 융성시대의 도래로 긍정 평가를 할 만도 하다.

사실 언제 우리가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라는 위상에 걸맞는 ‘아리랑 마당’을 펼쳐본 적이 있는가. 아리랑은 저항·대동·상생의 인류 보편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고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을 한 적이 있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아리랑연구소를 열겠다”는 문화재청장의 허언과 “중국 조선족적 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의 아류”라는 비문화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망언을 비판한 적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되짚어 보면 이는 명분있고 가치있는 아리랑현상이 분명하여 ‘아리랑문화 융성시대의 도래’로 의미화할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