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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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11월 이달의 기록물 : 천안캠퍼스의 시작 1970년대 우리 대학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농촌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지원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당시 장충식 총장은 수십차례 서울과 자매마을을 오가며 서울로 집중된 교육과 경제력이 전국으로 환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구상은 지역거점 캠퍼스의 신설로 구체화 되었고, 천안캠퍼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977년 4월 11일 단국대학교 천안분교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1978년 3월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산업대학’ 으로 개교하였다. 1978년 산업학관(현 자연과학1관), 인문학관(현 사회과학관) 으로 시작한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는 현재 15개 대학에 대학병원, 치과병원을 갖춰 교육과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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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9월 이달의 기록물 : 통학버스 1957년 6월 서울캠퍼스에 백의민족, 백두산, 청렴결백을 의미하는 백색을 칠한 세 개의 교사가 세워졌다. 그 중 본관은 건축면적 717㎡에 3층 건물로 지어져 대학 본부 역할을 했다. 본관은 1965년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캠퍼스 마스터플랜에 의해 4층 건물로 증축되었다. 1968년에는 본관 옆에 가정학관을 건축하여 나란히 자리하기도 했다. 이후 1986년 가정학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퇴계 기념중앙도서관이 완공되었다. 그 해 6월 21일, 도서관의 준공식을 앞두고 본관은 30여 년 소임을 다하고 철거되었다. 이후 도서관 앞 본관의 터는 해방광장으로 불리며 학생들의 공연, 집회, 투표 등을 개최하는 단국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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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9월 이달의 기록물 : 통학버스 우리 대학의 통학버스는 1958년 한남캠퍼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던 학생들이 운행 간격이나 노선에 불만이 많아지자 한남캠퍼스-삼각지, 한남캠퍼스-을지로6가 2개의 노선을 개설했다. 이후 구성원의 요구에 따른 대학의 대응으로 다양한 노선 뿐 만 아니라 귀향버스 운행, 캠퍼스간 교류 등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1958년 11월 21일 단대학보 제76호 1면 : 통학버스 두 대 정기운행 통학버스 두 대가 삼각지와 본교 간 을지로 육가와 본교의 두 구간을 정기로 운행하여 학생들의 통학점을 멀게 되었다. 본교-삼각지간 운행은 본교 발차시간이 상오 여덟시부터 매시 삼십분과 정각의 두차례로 출발하며 삼각지발 차 시간은 상오 여덟시 삼십분부터 매시 십오분과 사십오분의 두차례로 계속운행된 것이다 본교-서울운동장간 운행은 대학정문 앞 출발이 매시 정각과 삼십분 그리고 서울운동장발 차 시간은 상오 여덟시 십오분과 사십오분의 두차례로 계속 운행된다. 이상 통학규정의 개정 출석표제 실시 등 대학당국 조치에 대하여 학생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영문과 삼학년 A군 담(말하기를) 대학당국에서 금번 실시하기로 된 장학규정의 개정 출석독려 등에 대한 조치는 그 자체가 별로 특이한 것은 아니나 요컨대 우리들 학생들에세 다소라도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동시에 학구에 보다 더 정열을 기울이는데 자극을 주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우리들도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법률학과 이학년 B군담(말하기를) 금번 대학당국의 취하는 조치는 표면상으로 보면 하나의 형식을 바꾼것에 불과할지 모르나 당국이 의도하는 ?심점은 학생에게 학구열을 고취시키는데 있는만큼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이를 하나의 자극제로 하여 정통하는데 도움을 삼아야 할 것이다.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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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8월 이달의 기록물 : 건국공로훈장 범정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이다. 선생은 연통산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군자금을 조달했고 심양으로 들어오는 조선 청년들을 독립군에게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해방 이후에는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자 단국대학을 설립하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민강회 등 교육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밖에 독립투사들을 선양하는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온 가산을 독립운동에 기울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 생계가 곤란한 인사들이 많았다. 선생은 이런 사정을 헤아려 1959년 사비를 들여 애국지사위안회를 개최하여 항일투사들을 환대하고, 1961년에는 독립투사친목회를 결성하며 독립운동가나 그 유가족의 후원을 약속했고 실행했다. 1963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①1910년 경 양기탁, 유동열, 김구, 이시영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제공 ②1919년 이극, 안창하, 이진산 등의 동지를 남북만에서 활약케 하고 국내에서 무기 및 군자금을 조달하다 투옥 ③1945.8.15. 이후 독립지사 유자녀에게 생계비 및 학비조달)을 인정하며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인 투신과 실천이었으며 해방 이후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까지 이어졌다. 자주독립을 주창한 선생의 정신은 건국공로훈장과 더불어 독립기념관 내의 어록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박성순, 「환국 이후 범정 장형의 사회교육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7집, 2013년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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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월 이달의 기록물 : 통신교육부 설립자 범정 선생은 "국가와 민족의 재흥" 이라는 단국대학 설립정신을 바탕으로 1948년 4월 1일 「단국대학 부속 대학통신교육부」를 설치하였다. 통신교육부는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통신강의록으로 수강하는 제도로,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비슷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범정 선생은 "일제하에서 학문의 자유를 잃고 배움에 굶주린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배워야 되고, 배워서 알아야 문화민족으로의 체모를 잃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 며, 국민개학을 주창하였다. 배우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배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범정 선생의 교육이념이었다. 당시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근로자 및 독학생들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통신교육부가 설치된 것이다. 통신교육부는 법률과와 정치경제과 2개 학과, 2년 과정으로 전국에 통신교육부 지부를 설치하고 강의록을 간행하여 발송하여 학생들이 수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956년에는 교외생 9만 명을 돌파하며 많은 학생들이 단국대학 통신교육부를 통해 배움의 갈증을 채웠다. 1963년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단국대학 설립정신에 의거한 국민개학의 진정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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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6월 이달의 기록물 : 총학생회 총학생회 총학생회는 각 대학교에 있는 학생자치기구로써 개교 혹은 4·19혁명 전후로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지식인 계층으로서 사회 문제에 깊이 참여하는 운동권 성향의 조직이 구성되었고 이런 집단행동을 정부에서 경계함에 따라 대학의 학생자치회는 강제 해체와 발족을 여러번 거쳤습니다. 단국대학교 총학생회는 1948년 학생회로 시작하여 1949년 학도호국단으로, 1960년 학생회로 재조직되었다가 몇 차례 폐지와 개칭을 거쳐 1985년 총학생회로 부활되었습니다. 죽전캠퍼스 약 80명, 천안캠퍼스는 약 50명의 학생회장을 배출하며 활발히 활동중에 있습니다. 총학생회는 과거 '민주', '노동자' 등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다소 과격한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츰 변화되었고, 최근의 총학생회는 학생 인권과 교육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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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5월 이달의 기록물 : 학생운동 단국인은 해방 정국과 전쟁, 혁명,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동 속에서도 학문탐구의 등불을 밝힘과 아울러 정의로운 청년의 기개를 드높여왔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항해 4·19 혁명이 일어나자 단국인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김성수(영문과) 군은 혁명시위 도중 머리에 총탄을 맞아 1960년 5월 31일 사망하여 국립 4·19민주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동문 신동엽 시인은 이 혁명에 참여하고 훗날 기억을 되살려 시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기도 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도 단국인은 물러섬이 없었다. 1988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계승주간 행사 중 최덕수(법학과) 군이 분신을 기도, 사경을 헤매다 9일 만에 사망하였고, 민주해방열사로 안장되었다. 이렇듯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단국인의 기개는 애교심에도 발휘되었다. 1993년 7월 교육부의 단국대학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관선이사 파견 등의 과도한 징계 방침을 발표하자, 단국인은 반발하며 구교운동에 돌입하였다. 교수·직원·학생들은 '범단국인 구교추진 협의회'를 결성하여 동문들까지 나서서 연일 항의 시위와 구교기금 모금, 관선이사 파견철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교육부는 10월 관선이사 파견을 철회하였고, 단국인이 한마음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단국의 저력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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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4월 이달의 기록물 : 도서관 우리 대학 도서관은 1949년 11월 낙원동 교사에서 약 3천 권의 책을 갖추고 도서과로 출발하였다. 1957년 한남동으로 이전하면서 본관 2층에서 운영하다 1960년 4층의 도서관 건물을 신축하여 비로소 열람실과 시청각실을 갖춘 도서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196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단국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명실공히 중앙도서관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후 1986년 신축 도서관 건물로 이전하며 퇴계선생의 학풍을 계승 발전하고자 퇴계기념중앙도서관으로 개관하였고, 2007년 죽전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천안캠퍼스는 1978년 대학 개교 당시 산업학관에서 임시 도서관으로 출발하여 1985년 중앙도서관 분관 체제에서 변경하여 천안캠퍼스 도서관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의 석학이자 경세가인 율곡선생의 학덕과 인품을 본받기 위해 율곡기념도서관으로 명명하고, 1991년 현재 건물로 개관하였다. 우리 대학의 도서관은 지식의 전당으로 학문 탐구에 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지역 사회의 문화와 화합의 장으로 거듭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20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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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3월 이달의 기록물 : 박물관 우리 대학 박물관은 개교와 함께 설치된 사학과가 전국을 답사하며 발굴한 유물을 1960년부터 당시 도서관 건물의 1층에 진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대학 박물관의 시작이다. 종합대학 승격 후 1967년 5월 6일 정영호 교수를 박물관장서리에 임명하고 그 해 단국대학교 부속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후 1976년 난사 석주선 박사가 일평생 수집한 민속유물을 우리 대학에 기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81년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이 개관하였다. 1982년 박물관이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3층으로 이전하며 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 고고 · 미술을 다루는 중앙박물관과 민속·복식 중심의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으로 각각 운영되었다. 1999년 3월 두 박물관이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통합되었고, 제1종 종합 박물관으로 등록되어 정영호 석좌교수가 박물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2007년 죽전캠퍼스로 이전 후 2년간 준비기간을 거쳐 2009년 현재 모습으로 개관하였다. 현재 석주선기념박물관은 매해 각 분야의 특별전과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논문집과 자료집 발행하며 국내 고고·미술, 민속·복식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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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2월 이달의기록물 : 입학식 입학식은 신입생의 입학을 허가하고 축하하는 대학의 주요 행사이자 신학기의 시작을 알린다. 관련 시청각 기록물은 1967년 종합대학 승격 후 초대 총장 취임식과 함께 열린 입학식, 1979년 한남캠퍼스 입학식, 1985년 천안캠퍼스 입학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해당 기록물을 통해 대학 시설이나 규모를 비교하여 대학의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2024.01.08
214
1월 이달의 기록물 : 송사(送辭) 희망에 넘치는 무신의 새해를 맞아 단국의 문을 나서는 선배님들을 축복해 주시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대한 자리를 베풀어 주신 이사장님 그리고 총장님께 우선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떠나시는 선배 여러분의 앞날에 건투와 행운이 함께 있기를 빌어 마지않으며 몇 말씀 송사를 올리게 되오니 실로 감개무량합니다....(중략)...선배님들의 앞날에 무궁한 전진과 행운이 같이 하기를 빌면서 아쉬운 송사에 가름하나이다. 1968년 2월 28일 재학생대표 김 선 태 단국역사관 1월 이달의 기록물은 1968년 학위수여식의 재학생 대표였던 김선태 동문이 작성하고 낭송한 송사문입니다. 이 송사문은 당시 사회상은 물론 모교에 대한 선배들의 애정과 사명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입니다. 단국역사관에서는 해당 기록물을 표구하고 보존처리하여 상설전시실에 전시 중에 있습니다. 또한 송사문과 함께 옛 졸업식 모습을 촬영한 아래의 시청각 기록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3.12.07
219
12월 이달의 기록물 : 입시풍경 단국역사관 12월 이달의 기록물 주제는 입시풍경입니다. 1982년~1993년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기준으로, 선배님들의 대학 지원 과정을 시청각 기록물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모집안내를 확인하면, 원서를 작성합니다. 직접 지원 대학을 찾아가 원서를 작성하고 제출해야 합니다. 지원자가 많으니 시험의 규모도 엄청납니다. 일정 등 안내사항을 전달받으려면 반드시 수험생 예비소집에 참석해야 합니다. 이 예비소집에서 학력고사를 치룰 고사장을 확인합니다. 내 수험번호, 고사장, 지정 장소를 틀리지 않게 잘 메모하고 꼭 기억해둬야 합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까요. 시험 당일, 지정 장소에서 시험을 치릅니다. 지망한 대학 캠퍼스가 아닌 해당 지역 내 중학교에서 시험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같은 반의 수험생들이 모두 나와 같은 대학을 지망한, 경쟁자이자 미래의 동기가 될 수 있는 친구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 침착하게 시험에 응해야 합니다. 시험을 마치면 면접과 함께 예체능은 실기 시험은 응시합니다. 면접 점수는 학교마다 반영률이 다르긴 하지만, 이왕 잘 보면 마음이 더 홀가분하죠. 마지막으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면 수험 과정은 모두 끝납니다. 원서접수, 예비소집, 시험, 면접, 합격자 확인까지 최소 다섯번은 지원 대학을 방문해야 했네요. 이전의 입시풍경은 지금과 비교했을때 더 많은 시간이 들고 추위에 고생도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 재미있는 풍경들이 보입니다. 예비소집일 고등학교 동문 후배를 응원하는 선배들의 플랜카드나, 학력고사장 앞에서 찹쌀떡을 파는 모습,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온 긴장한 얼굴들. 함께 살펴본 이달의 기록물은 어떠셨나요? 더 많은 기록물 관람을 원하시면 단국역사관 상설전시실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