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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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5년 5월 이달의 기록물 : 동양학연구원 동양학연구원은 1970년 9월 28일 한국·중국·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역사·문화 및 교류관계를 연구하기 위한 기구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의 명칭은 동양학연구소였다. 2011년 9월 1일 교책중점연구기관으로 지정되었고, 명칭도 동양학연구원으로 바꾸었다. 주요 사업으로 매년 국내외 석학들이 참여하는 동양학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학술지로 『東洋學』을 간행하고 있다. 그리고 희귀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과제 수행과 번역작업을 수행하고, 이를 총서와 단행본 등으로 편찬하고 있다. 그 외 대표 업적으로는 『한국한자어사전』 4권과 『한한대사전』 16권의 사전 편찬이 있다. 해당 편찬사업은 제작기간 30년에 20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고 투입된 예산만 총 310억원에 달한다. 이같은 업적에 한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봉황의 털과 기린의 뿔만큼 보기 드물고 귀한 학자의 자세'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근래에는 한국식 한자와 이두 관련 학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편찬한 『이두사전(2020)』 , 『한국한자자전(2023)』을 집대성해 온라인으로 서비스할 수 있도록 디지털 사전을 선보였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은 한국문화를 기축으로 동양문화에 관한 제 문제를 연구하며,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과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① 1975. 12. 30 동양학연구소 개관 및 서문 개통식 ② 1984. 2. 22 제3대 소장 황패강 교수와 제4대 소장 김동욱 교수 대담 ③ 1978. 4. 동양학연구소 편찬지도위원 이강로 교수 ④ 1978. 4. 동양학연구소 편찬지도위원 권오돈 교수 ⑤ 1977. 10. 15 제7회 동양학 학술회의 『한국중세문화의 특성 조선왕조 전기』 ⑥ 1991. 10. 22 제21회 동양학 학술회의 『조선왕조후기 근대국어의 특징과 연구사 검사』 ⑦ 1996. 11. 3 『한국한자어사전 韓國漢字語辭典』 총 4권 완간 ⑧ 2008. 9. 22 『한한대사전 漢韓大辭典』 15권 완간 ⑨ 2020. 10. 『이두사전 吏讀辭典』 출간 ⑩ 2023. 12. 『한국한자자전 韓國漢字字典』 출간 ※해당 조형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단국역사관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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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5년 4월 이달의 기록물 : 캠퍼스 조형물 봄을 맞이해 캠퍼스 내 조형물들을 소개합니다. 교내 기념비, 추모비, 동상 등 조형물들의 건립시기와 추진배경, 해당 조형물의 위치를 함께 준비했습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캠퍼스 속 조형물을 함께 살펴보고 그 안에 새겨진 숭고한 이념과 의미를 확인해보세요. 1. 한남캠퍼스 : 시계탑 2. 한남캠퍼스-죽전캠퍼스 : 신동엽 시비(1993. 4. 7) 3. 한남캠퍼스-죽전캠퍼스 : 4.19기념비(1988. 4. 20) 4. 한남캠퍼스-죽전캠퍼스 : 김용호 시비(1975. 5. 14) 5. 죽전캠퍼스 : 교시비 6. 천안캠퍼스 : 사랑의 상(1980. 9. 18) 7. 천안캠퍼스 : 최덕수 추모비(1989. 5. 18) 8. 천안캠퍼스 : 교시비(1989. 2. 22) ※해당 조형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단국역사관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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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5년 3월 이달의 기록물 : 학도수첩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으로 단국대학은 막 이사한 신당동 교사를 두고 피난을 떠났다. 해가 바뀌어도 전쟁이 끝나기는 커녕 장기화되는 조짐을 보이자 단국대학을 포함한 12개의 대학이 부산전시연합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난수도 부산에서 2월 18일에 수업을 시작했다. 우리 대학은 1951년 9월 대구에서 제1회 졸업식을 치르고 부산에서 교사를 마련해 개강했다. 부산 대청동 4가 77번지의 피난 교사는 7평 교실 4칸과 사무실 등이 구비된 한 동의 임시 건축물로 초라하고 교수와 학생들은 교복은 커녕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학구의 등불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올랐다. 3월 이달의 기록물은 노재훈 동문이 기증한 학도수첩과 사진으로 위와 같이 전쟁 중 단국대학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학도수첩은 전쟁 중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대학생들에게 발급된 수첩으로 수첩 안에 학생증이 있어 신분증 역할을 했다. 그 외 애국가, 학도호국단의 노래, 대한수기신호법, 거리재기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에서는 당시 대청동의 임시 교사의 모습, 송도로 야유회를 떠난 모습, 광복동 -대청동 인근에서 행진을 하는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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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5년 2월 이달의 기록물 : 졸업기념품 1.1973년 금속 재떨이 / 제23회 졸업생일동 2. 1974년 금속 재떨이 / 제24회 졸업생일동 3. 1976년 벽걸이 온도계 / 제26회 졸업생일동 4. 1981년 금속 메달 / 기계공학과 제11회 졸업 5. 1983년 금속 기념패 / 가정학과 제2회 졸업 6. 1983년 문진 / 체육교육학과 제16회 졸업 7.1985년 금속 기념패 / 한문교육과 제8회 졸업 8. 1987년 촛재 / 제37회 졸업준비위원회 9. 1996년 금속 메달 / 의과대학 제3회 졸업 2월 학위수여식이 있는 달을 맞아 졸업기념품을 준비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제작된 기념품으로, 재떨이, 온도계, 문진, 기념메달, 기념패, 촛대 등의 다양한 제품을 보실 수 있어요. 그리고 기념품마다 숨겨진 곰이나 학과의 상징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새 제작되는 기념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대학생활에 대한 추억과 앞날에 대한 축하의 의미를 담았다는 것이겠네요. 오늘 졸업한 단국인들에게 선명한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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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5년 1월 이달의 기록물 : 추억으로 나부끼는 페넌트 1. 1971년 2월 25일 제21회 졸업을 기념하며 총학생회에서 제작 2. 1971년 10월 26일 동양학학술회의를 주최한 동양학연구소에서 제작 3. 1972년 9월 26일 제10회 한남축전을 개최하며 제23대 총학생회에서 제작 4. 1973년 10월 25일 용주사로 추계야유회를 떠나며 대학원에서 제작 5. 1973년 11월 3일 공과대학장배 체육대회를 개최하며 공과대학 학생회에서 제작 6. 1973년 11월 12일 여학생취미전을 개최하며 총학생회 여학생부에서 제작 7. 1974년 11월 4일 한남캠퍼스 학생회관 기공식을 기념하며 학교법인에서 제작 8. 1975년 5월 30일 관현악단·오페라단이 한강 볼링센터 (현 한남역 인근)에서 창단식을 개최하며 제작 9. 1980년 10월 19일 2부대학 학도호국단(총학생회)에서 체육대회를 개최하며 제작 10. 1981년 5월 16일 천안캠퍼스 제1회 축제를 개최하며 제작 11. 1981년 10월 12일 천안캠퍼스 농학과에서 청양농장 실습을 기념하며 제작 12. 1985년 박물관에서 경희궁지 발굴조사를 기념하며 제작 페넌트는 끝이 가늘어지는 깃발 혹은 우승을 기념하는 깃발을 의미합니다. 주로 스포츠에서 사용되지만 관광지나 기념품으로도 제작됩니다. 최근에는 거의 제작되지 않지만 예전엔 중요 행사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페넌트를 만들어 추억하곤 했습니다. 단국역사관에서 소장 중인 우리 대학의 페넌트를 살펴보면 흥미롭고 즐거운 행사들이 가득합니다. 옛 페넌트를 살펴보며 오랜 기간 준비하고 고대했던 날들을 깃발에 담았던 설렘을 느껴보세요.

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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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12월 이달의 기록물 : 죽전캠퍼스 1990년대 대학 정원의 급격한 증가로 경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우리 대학이 처한 상황은 밝지 않았다. 서울캠퍼스 부지의 물리적 한계로 정부의 대학평가 기준을 채우기가 어려웠고, 부지에 대한 법적 규제가 고도제한, 자연경관지구, 풍치지구 등으로 이중 삼중의 규제를 받고 있었다. 1994년 11월 2일 대학은 서울캠퍼스 이전 사업을 공식 선언하였으나 교육부의 관선이사 파견부터 IMF, 이전반대 시위 등 대학 대내외로 순탄 치 않았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구성원들의 단합을 이뤄내고 장단기 발전계획을 수립하며 나아갔다. 2007년 8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으로 우리 대학의 위치 변경이 인가됨으로써 10여 년에 걸친 대학이전 사업이 마무리되고 죽전캠퍼스 시대가 열렸다. 죽전캠퍼스는 우리 대학이 수많은 격량과 역경을 이겨낸 새로운 터전으로써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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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11월 이달의 기록물 : 천안캠퍼스의 시작 1970년대 우리 대학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농촌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지원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당시 장충식 총장은 수십차례 서울과 자매마을을 오가며 서울로 집중된 교육과 경제력이 전국으로 환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구상은 지역거점 캠퍼스의 신설로 구체화 되었고, 천안캠퍼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1977년 4월 11일 단국대학교 천안분교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1978년 3월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산업대학’ 으로 개교하였다. 1978년 산업학관(현 자연과학1관), 인문학관(현 사회과학관) 으로 시작한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는 현재 15개 대학에 대학병원, 치과병원을 갖춰 교육과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2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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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9월 이달의 기록물 : 통학버스 1957년 6월 서울캠퍼스에 백의민족, 백두산, 청렴결백을 의미하는 백색을 칠한 세 개의 교사가 세워졌다. 그 중 본관은 건축면적 717㎡에 3층 건물로 지어져 대학 본부 역할을 했다. 본관은 1965년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캠퍼스 마스터플랜에 의해 4층 건물로 증축되었다. 1968년에는 본관 옆에 가정학관을 건축하여 나란히 자리하기도 했다. 이후 1986년 가정학관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퇴계 기념중앙도서관이 완공되었다. 그 해 6월 21일, 도서관의 준공식을 앞두고 본관은 30여 년 소임을 다하고 철거되었다. 이후 도서관 앞 본관의 터는 해방광장으로 불리며 학생들의 공연, 집회, 투표 등을 개최하는 단국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2024.09.05
274
단국역사관 2024년 9월 이달의 기록물 : 통학버스 우리 대학의 통학버스는 1958년 한남캠퍼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던 학생들이 운행 간격이나 노선에 불만이 많아지자 한남캠퍼스-삼각지, 한남캠퍼스-을지로6가 2개의 노선을 개설했다. 이후 구성원의 요구에 따른 대학의 대응으로 다양한 노선 뿐 만 아니라 귀향버스 운행, 캠퍼스간 교류 등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1958년 11월 21일 단대학보 제76호 1면 : 통학버스 두 대 정기운행 통학버스 두 대가 삼각지와 본교 간 을지로 육가와 본교의 두 구간을 정기로 운행하여 학생들의 통학점을 멀게 되었다. 본교-삼각지간 운행은 본교 발차시간이 상오 여덟시부터 매시 삼십분과 정각의 두차례로 출발하며 삼각지발 차 시간은 상오 여덟시 삼십분부터 매시 십오분과 사십오분의 두차례로 계속운행된 것이다 본교-서울운동장간 운행은 대학정문 앞 출발이 매시 정각과 삼십분 그리고 서울운동장발 차 시간은 상오 여덟시 십오분과 사십오분의 두차례로 계속 운행된다. 이상 통학규정의 개정 출석표제 실시 등 대학당국 조치에 대하여 학생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영문과 삼학년 A군 담(말하기를) 대학당국에서 금번 실시하기로 된 장학규정의 개정 출석독려 등에 대한 조치는 그 자체가 별로 특이한 것은 아니나 요컨대 우리들 학생들에세 다소라도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동시에 학구에 보다 더 정열을 기울이는데 자극을 주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본다. 우리들도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법률학과 이학년 B군담(말하기를) 금번 대학당국의 취하는 조치는 표면상으로 보면 하나의 형식을 바꾼것에 불과할지 모르나 당국이 의도하는 ?심점은 학생에게 학구열을 고취시키는데 있는만큼 그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이를 하나의 자극제로 하여 정통하는데 도움을 삼아야 할 것이다.

20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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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8월 이달의 기록물 : 건국공로훈장 범정 선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이다. 선생은 연통산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군자금을 조달했고 심양으로 들어오는 조선 청년들을 독립군에게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해방 이후에는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자 단국대학을 설립하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민강회 등 교육현장에서 활동했다. 그 밖에 독립투사들을 선양하는 사업들을 전개하였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온 가산을 독립운동에 기울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 생계가 곤란한 인사들이 많았다. 선생은 이런 사정을 헤아려 1959년 사비를 들여 애국지사위안회를 개최하여 항일투사들을 환대하고, 1961년에는 독립투사친목회를 결성하며 독립운동가나 그 유가족의 후원을 약속했고 실행했다. 1963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①1910년 경 양기탁, 유동열, 김구, 이시영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제공 ②1919년 이극, 안창하, 이진산 등의 동지를 남북만에서 활약케 하고 국내에서 무기 및 군자금을 조달하다 투옥 ③1945.8.15. 이후 독립지사 유자녀에게 생계비 및 학비조달)을 인정하며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선생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인 투신과 실천이었으며 해방 이후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까지 이어졌다. 자주독립을 주창한 선생의 정신은 건국공로훈장과 더불어 독립기념관 내의 어록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문헌 박성순, 「환국 이후 범정 장형의 사회교육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7집, 2013년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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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월 이달의 기록물 : 통신교육부 설립자 범정 선생은 "국가와 민족의 재흥" 이라는 단국대학 설립정신을 바탕으로 1948년 4월 1일 「단국대학 부속 대학통신교육부」를 설치하였다. 통신교육부는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통신강의록으로 수강하는 제도로,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비슷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범정 선생은 "일제하에서 학문의 자유를 잃고 배움에 굶주린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배워야 되고, 배워서 알아야 문화민족으로의 체모를 잃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 며, 국민개학을 주창하였다. 배우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배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범정 선생의 교육이념이었다. 당시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근로자 및 독학생들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통신교육부가 설치된 것이다. 통신교육부는 법률과와 정치경제과 2개 학과, 2년 과정으로 전국에 통신교육부 지부를 설치하고 강의록을 간행하여 발송하여 학생들이 수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956년에는 교외생 9만 명을 돌파하며 많은 학생들이 단국대학 통신교육부를 통해 배움의 갈증을 채웠다. 1963년 문교부의 지시에 의해 폐지되었으나 단국대학 설립정신에 의거한 국민개학의 진정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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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역사관 2024년 6월 이달의 기록물 : 총학생회 총학생회 총학생회는 각 대학교에 있는 학생자치기구로써 개교 혹은 4·19혁명 전후로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은 지식인 계층으로서 사회 문제에 깊이 참여하는 운동권 성향의 조직이 구성되었고 이런 집단행동을 정부에서 경계함에 따라 대학의 학생자치회는 강제 해체와 발족을 여러번 거쳤습니다. 단국대학교 총학생회는 1948년 학생회로 시작하여 1949년 학도호국단으로, 1960년 학생회로 재조직되었다가 몇 차례 폐지와 개칭을 거쳐 1985년 총학생회로 부활되었습니다. 죽전캠퍼스 약 80명, 천안캠퍼스는 약 50명의 학생회장을 배출하며 활발히 활동중에 있습니다. 총학생회는 과거 '민주', '노동자' 등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다소 과격한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츰 변화되었고, 최근의 총학생회는 학생 인권과 교육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